
예전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악역은 단순히 미워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Z세대는 이야기 속 악역에게 오히려 더 감정이입을 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며 ‘이해 가능한 악역’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주인공보다 악역에게 더 끌리고, 그들의 과거, 상처, 서사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왜 Z세대는 영웅보다 빌런에 더 마음이 가는 걸까요? 단순히 반항심이나 유행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 구조와 현실 인식의 방식이 바뀌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 글에서는 Z세대가 악역을 바라보는 심리와 콘텐츠 해석 방식의 변화를 살펴봅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기존의 이야기 구조는 명확한 구분을 전제로 했습니다. 선한 주인공은 옳고, 악한 인물은 물리쳐야 했죠. 하지만 Z세대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까’에 집중합니다. 악역이 된 이유, 그 선택 뒤에 숨은 감정과 사회적 배경, 관계의 단절 등을 주목하며 그들의 감정적 맥락을 읽어냅니다. 이는 정답 중심 서사에서 해석 중심 서사로 전환된 현대 콘텐츠 구조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Z세대는 감정을 받아들이기보다 해석하고 분석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악역이 단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인식되며, 거기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투영하게 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악’을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회색 지대에 있는 인물에게 더 끌리며, 단순히 악하다고 배척하기보다 복잡한 감정과 상황 속에서 선택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상처와 결핍을 감정의 언어로 읽는 세대
악역이 가진 트라우마, 가족의 부재, 과거의 학대, 인정받지 못한 욕망은 Z세대에게 ‘악행의 정당화’가 아니라, 감정의 출처로 인식됩니다. 이들은 캐릭터의 행동보다 그 행동을 만든 내면의 서사에 집중합니다. 감정의 진위를 따지고, 왜곡된 선택의 배경을 분석하며 ‘악한 사람’이 아닌 ‘상처 입은 사람’으로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특히 Z세대는 자기감정에 민감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이해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역이 감정을 숨기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분출할 때 오히려 그 내면을 ‘공감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라도 그 상황이면 그랬을 거 같아”라는 감정의 동조는, 악역을 단순한 타자에서 ‘내가 될 수도 있는 존재’로 바꾸는 감정적 거리 좁힘의 결과입니다. 이는 콘텐츠를 통해 감정의 구조를 배워가는 Z세대의 특성과도 연결됩니다. 이들은 ‘이 캐릭터가 나쁜 일을 했는가’보다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가’를 묻고, 거기서 감정의 레이어를 쌓아갑니다. 그래서 악역이 눈물을 보이거나,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더 깊은 몰입을 느끼기도 합니다.
주인공보다 악역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시대
Z세대는 완벽하고 도덕적인 주인공보다, 실수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악역에게서 더 현실적인 인간상을 발견합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때론 자기 방어에 치우치며, 때론 타인을 상처 입히는 인물에게서 자신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투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드라마나 영화의 악역은 점점 더 ‘입체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단지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의 또 다른 주체이자, 서사의 균형을 만드는 존재가 되었죠. 주인공이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주거나, 대놓고 감정을 터뜨려주고, 억압된 감정을 대리 분출해 주는 악역은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Z세대는 이 감정 분출의 순간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악역은 대신 감정을 표현해 주는 ‘대변자’가 되며, 때로는 감정의 해소를 위한 심리적 수단으로 소비되기도 합니다. 악역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닌, ‘또 다른 나’의 확장인 셈입니다.
결론: 악역에 끌리는 건 반항이 아니라 감정 이해의 방식
Z세대가 악역에 공감하는 건, 단순한 반항도, 유행도 아닙니다. 그들은 감정을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감정 중심의 콘텐츠 소비자입니다. 악역이 보여주는 불완전한 감정과 복잡한 선택, 무너짐과 폭발은 이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감정의 언어입니다. 악역을 향한 공감은 사회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기 감정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감정이 억제된 시대를 지나, 감정을 해석하고 발화하는 시대. Z세대는 콘텐츠 속 악역을 통해 ‘나를 이해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