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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물인데 연애가 없다? – 변화하는 로맨스 서사

by chocolog 2025.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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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영되는 드라마나 인기 웹툰, OTT 콘텐츠를 보면 ‘연애물’이라 불리지만, 정작 연애 장면이 많지 않습니다. 키스신, 고백, 갈등, 화해 같은 전통적인 공식이 사라지고, 대신 미묘한 감정선, 거리감, 우정과 같은 비(非) 연애적 관계가 중심이 됩니다. 제목은 로맨스인데,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거나 아예 연애 자체가 없는 서사가 늘어나고 있죠. 시청자들은 이 변화에 혼란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빠져듭니다. 왜 요즘 연애물은 연애를 하지 않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Z세대의 감정 소비 방식과 로맨스 장르 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이 흐름을 분석해 봅니다.

‘로맨스’라는 틀 안에서 감정을 다시 설계하는 콘텐츠들

예전의 연애물은 뚜렷한 패턴이 있었습니다. 우연한 만남 – 갈등 – 이별 – 극복 – 재회 – 결혼. 이 공식은 안정감과 기대감을 주었고, 시청자는 감정의 기승전결을 편안하게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로맨스 서사는 감정의 방향보다 감정의 ‘결핍’과 ‘유보’에 초점을 둡니다. 요즘 인기 있는 K-드라마나 웹드라마는 관계의 시작보다 관계가 되기 직전의 감정을 오래 탐구합니다. 고백보다 ‘말하지 않는 감정’, 썸보다 ‘경계선에 있는 친밀함’, 사랑보다 ‘사랑이 될지도 모르는 감정’이 중심이 되죠. 이 같은 서사 구조는 감정의 폭발보다 감정의 보류, 유예, 억제를 통해 긴장을 만듭니다. 이는 시청자들에게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주며, 연애라는 결과보다 감정의 흐름 자체에 몰입하도록 유도합니다. 즉, 과거의 로맨스가 관계의 진전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감정선을 설계하는 데 집중합니다.

왜 Z세대는 연애보다 감정의 흐름에 끌릴까?

Z세대는 관계를 맺는 것에 있어 훨씬 신중하고, 동시에 감정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능숙한 세대입니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명확한 감정보다, 그 감정이 생겨나는 순간의 흔들림, 상대에게 말하지 못한 감정, 혼자 느끼는 설렘이나 불안에 더 집중합니다. 이는 현실에서의 관계 피로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연애는 달콤하지만, 동시에 많은 에너지와 감정 소모를 요구합니다. Z세대는 실제로도 연애를 하지 않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그만큼 콘텐츠에서도 ‘연애를 하지 않는 서사’에 더 쉽게 감정 이입을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 밀착보다 거리감에 감정적 안정을 느끼는 이 세대는, 관계를 맺기보다는 관찰하거나 상상하는 것에 더 익숙합니다. 또한 SNS, 짧은 영상, 텍스트 중심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자란 이들은, 명확하게 표현된 감정보다 암시, 눈빛, 거리, 행동의 숨은 의미에 더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대사보다, 그 말을 하지 못한 긴 정적, 눈빛, 주저하는 손짓 등에 더 깊은 감정 몰입을 하죠.

변화하는 로맨스 서사: 관계보다 감정, 구조보다 여운

최근 로맨스 콘텐츠에서는 연애의 시작도 끝도 명확하지 않은 구조가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까지도 두 주인공이 사귀는지 아닌지, 마음을 전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결말이 많아졌죠. 하지만 이 열린 결말은 오히려 시청자에게 더 강한 여운과 해석의 자유를 줍니다. 이처럼 ‘연애는 없지만 연애물인’ 콘텐츠는 관계의 성립이 아닌, 감정의 형성과 흔들림, 상실과 회복의 기류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리듬을 구성합니다. 주인공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대면하고,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를 통해 자기를 발견하며, 결국 ‘관계’가 아니라 ‘정서’가 서사의 중심이 되는 구조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 흐름은 단지 유행이 아닙니다. 콘텐츠 소비자의 감정 구조가 바뀌고 있으며, 특히 Z세대는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그 단어로 향하는 복잡하고 느린 감정의 여정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연애물인데 연애가 없다’는 말은 더 이상 모순이 아니라, 지금의 로맨스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결론: 느리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감정들

우리는 더는 “사귈까? 안 사귈까?”라는 질문보다, “이 감정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연애를 전제로 하지 않아도 감정을 중심에 둘 수 있고, 관계의 진전 없이도 긴장과 몰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연애물의 정의는 이제 결과가 아니라 감정의 층위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Z세대는 이 느린 감정의 서사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깊게 관찰하며, 더 조용히 몰입합니다. 연애가 없는 연애물은 사랑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이전의 순간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서사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이, 더 절실한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